안준형_오픈월드 게임에서 슬라임 잡는 asmr을 듣는다

안준형

샌드박스라 불리우는 독특한 게임 장르가 있다샌드박스(sand bax)란 말 그대로 모래 상자’,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모래성 쌓기 놀이가 어원이 된 말로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모래사장 위에서 그저 자유롭게 모래성을 쌓고 부수며 유희하는 것처럼샌드박스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 또한 자유롭게 주어진 게임 공간 내에서 자율적으로 유희하는 것을 원리로 한다그와 같은 플레이어의 게임 속 자유를 위해 샌드박스 장르는 게임의 목적과 규칙이 없거나아주 희미할 것을 장르적 특징으로 갖는다.

게임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고유한 규칙의 구조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다하지만 샌드박스 장르는 플레이어의 자유가 곧 기준이며바로 그 자유를 위해 최대한 게임의 규칙이 없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그 점에서 샌드박스의 유희 원리는 게임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이율배반적이다하지만 제아무리 목적과 규칙 없이 게임에 던져진 플레이어라도 그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또 갱신하는 일로서 놀이할 수 있다실제로 샌드박스는 그런 방식으로 플레이되곤 한다그러므로 샌드박스는 규칙이 없다기보다는 규칙이 느슨한 것이며그로 인해 플레이어가 이 안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플레이 목적과 규칙을 갱신하며 놀이하는 것에 가깝다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샌드박스는 환상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말로 샌드박스라고 부를 수 있을법한 게임적 체험의 유형이 나타나고 있는 것만 같다진정으로 샌드박스인 것모래성을 쌓아 올리는’ 목적보다도 손끝에 느껴지는 모래 알갱이들의 순수한 자극의 즐거움으로부터 얻어지는 유희는 정말 아무런 목적이 없어 보인다그것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촉각적 게임들의 한 유형이다.

흔히 게임은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가 결합된 종합 매체로 이야기되곤 한다. 하지만 오늘날 여기엔 또 하나의 중요한 항이 추가되어야 할듯싶은데 바로 ‘촉각성’이다. 올해 초 새로운 세대의 콘솔 게임기가 출시되며 게이머들 사이에선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현대 게이밍 기기의 양대 진영인 ‘엑스박스’와 ‘플레이스테이션’은 각각 9세대 게임기인 ‘시리즈 엑스’와 ‘플레이스테션5’를 출시했다. 기대된 만큼의 성능 향상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게임적 체험의 확장을 꾀하는 공학적 개선 역시 시도되었다. 그중 가장 큰 이야깃거리가 된 것은 단연 플레이스테이션5의 전용 컨트롤러인 ‘듀얼센스’다. 그저 주변기기에 불과한 ‘듀얼센스‘에 관한 이야기는 여지껏 게임적 체험에서 핵심적인 요인으로 여겨졌던 ’그래픽‘ 및 ’프레임‘과 같은 성능과 시각 중심의 이슈들을 금세 뒷전으로 제쳐두며 훨씬 주목받았다. 이는 이른바 ’햅틱 피드백‘이라 불리는 듀얼센스의 핵심 ’진동‘ 기능에 의해 가능한 일이었다.

듀얼센스는 게임의 물리적 인터페이스인 컨트롤러다. 플레이어는 컨트롤러를 조작함으로써 게임 공간에 자신의 명령을 전달한다. 컨트롤러는 그렇게 플레이어와 게임 공간 사이를 중개한다. 컨트롤러는 흔히 플레이어의 게임 조작을 위한 입력장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컨트롤러는 플레이어에게 게임 플레이 중의 피드백을 전달하는 일종의 출력 장치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진동‘ 기능이 그것이다. ’진동‘ 기능이란 게임 플레이 도중 벌어지는 온갖 상황에 대응하여 컨트롤러 내부에 설치된 모터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말 그대로 컨트롤러가 진동하는 기능이다. 이를테면 플레이어가 게임 속에서 총을 쏜다면 이는 스크린 위에서 시각적으로 재생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스피커에서 발포 사운드가 재생되듯, 컨트롤러가 진동하는 것이다.

대다수 게임을 PC로 즐기는 한국에서 게임의 진동 기능은 다소 생소할 수 있다그러나 키보드와 마우스 대신 컨트롤러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콘솔 게이머들에게 컨트롤러의 진동 기능은 이미 게임 체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여겨진다컨트롤러의 진동 기능은 시청각적 중심의 게임 체험을 보다 생생하게 보충해왔다그러나 햅틱 피드백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된 듀얼센스의 진동 기능은 게임적 체험에서의 촉각 자극을 부차적인 것 이상으로 만들었다마치 바이브레이터와도 같이 진동하는 듀얼센스를 조작하는 일은 손끝에 느껴지는 촉각 자극의 쾌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게임적 체험이 된 것이다.

이같은 촉각 자극의 대두는 비단 게임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문화 현상들 사이에서 관측된다. 영화 영역에서는 이미 4DX와 같이 촉각 자극을 영화적 체험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가 있어 왔으며, 몇 해 전부터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컨텐츠인 ’ASMR‘은 가히 촉각적 사운드라 불려도 크게 손색이 없어 보인다. ’비 내리는 소리’와 같은 백색소음에서부터 ‘먹방’까지 온갖 소리들이 ASMR이 되어 게시되고 있다. 수많은 ASMR 컨텐츠 중에서도 유독 대표적인 것은 단연 ‘귀 파는 소리’인데, 이를 듣고 있자면 마치 실제로 귀를 파주는 것과 같은 촉각적인 자극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처럼 ASMR은 청각을 중심으로 하지만 촉각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다.

몇 해 전부터 ‘슬라임’ 혹은 ‘액체 괴물(액괴)’로 불리우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일은 가히 문화적인 현상이 되었다. 으레 어린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장난감들이 그렇듯 몇 주기 유행하고 마는 것이 장난감의 운명이다. 하지만 이 액괴를 가지고 노는 일은 단순히 특정한 나이대의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마음까지도 크게 사로잡은 듯 보였다. 지금은 다소 시들해졌을지 몰라도 여전히 유튜브에서는 연령층에 상관없이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컨텐츠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는 슬라임 카페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액괴를 가지고 노는 일이 왜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는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듯 보인다. 슬라임 유행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슬라임 놀이는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이 광범위하게 유행되었다는 점에서 우선 눈길을 끈다이는 그저 또 다른 키덜트 문화의 한 가닥일 뿐인 것일까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일은 마치 레고를 가지고 노는 일처럼 무언가를 만들고 조형하는 일처럼도 보인다언뜻 보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슬라임은 찰흙처럼 또는 레고처럼 어떤 형상이든 만들 수 있으며그런 무언가를 조형하는 데에서 이를 가지고 노는 즐거움을 얻는 것처럼도 보인다하지만 슬라임은 액체’ 괴물이며물컹물컹하고 과도하게 흐믈흐믈 거린다그렇기 때문에 슬라임은 단 1초도 특정한 형상을 유지할 수 없고그 어떤 것도 조형될 수 없다말하자면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행위는 반조형적이다흔히 레고나 찰흙 놀이는 조형적인 특징을 갖는 까닭에 어린아이들의 창의력을 발달시키기에 좋은 착한 놀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하지만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일에 있어서 그러한 조형의 가능성은 끊임없이 유보된다어쩌면 사실 그러한 특징이 슬라임 놀이의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른다마치 모래성 쌓기 놀이에서처럼 슬라임을 가지고 노는 일은 슬라임을 만지고 있을 때의 손끝에 느껴지는 촉각 자극의 쾌락적 순간 자체가 중요한 일로 보인다.

문화 이론가 마크 피셔는 자신의 저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우울증적 쾌락이라고 하는 동시대 자본주의의 독특한 정서 상태에 관해서 이야기한다흔히 우울증을 특징짓는 것은 쾌락을 추구할 수 없는 무능일 텐데우울증적 쾌락이란 쾌락을 추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라고 마크 피셔는 말한다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주요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듯수업 도중 헤드셋을 끼고 있거나 노트북이나 휴대폰으로 딴짓 하기를 멈출 수 없는 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며이들이 단순히 일탈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극받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시대적인 증상에 빠진 것만 같다고 말한다.1)

다른 한편에서 이와 유사한 주체의 마비 상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서동진은 최근 몇 년 사이 시각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풍경 이미지에 관한 특별한 애호 경향에 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가 말하길 이는 총체화 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계에의 고백재현불가능한 세계의 증언이다그런 점에서 풍경 이미지는 단순히 자연적인 대상에 관해서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우울증적 쾌락과도 같은 주체의 무력감 혹은 마비 상태에 관한 것이기도 하며동시에 이에 대한 원인으로서 놓여진 세계상에 관한 하나의 단서인 셈이다.2)

그리고 촉각 자극의 게임은 그와 같은 주체플레이어의 곤경을 또 다르게 처리하는 것만 같다여기선 아무런 목적도 형상도심지어는 이미지도 없다오직 순간의 자극 자체가 중요할 뿐이며 이를 지각하는 것으로 확인 가능한 현재적인 감각만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주체의 마비 상태에 빠진 이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놀이인 것처럼 보인다.

‘오픈월드’라 불리우는 게임 장르는 ‘샌드박스‘와 같이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유희를 강조한다. 그러한 게임 속 자유로움의 척도를 흔히 ‘자유도’라고 표현하곤 한다. 자유도가 높다고 여겨지는 오픈월드 게임은 말 그대로 무제한적으로 오픈되어 있는 방대한 규모의 게임 월드를 갖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유롭게 플레이될 수 있는 반면, 자유도가 낮다고 여겨지는 게임은 선형적인 플레이 구조를 갖고 있으며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 시간성 및 장소성이 여러모로 제약되어 있는 게임들을 일컫는다.

오픈월드 장르는 아마도 최근 몇 년 동안 게임계에서 가장 흥행한 장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어떤 게임이라도 한 번쯤은 오픈월드가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 오픈월드 속에서 우리는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자유도를 바탕으로 말 그대로 자유롭게 유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목적과 규칙이 느슨한 게임 안에서 나 스스로 이 놀이의 목적과 규칙을 재설정할 수 있다. 이는 언뜻 보기에 굉장히 해방적인 순간처럼도 보인다. 우리는 전적으로 플레이(어)를 속박하는 게임의 룰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플레이어는 여기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룰 자체의 주인이 되었다. 게임 공간은 그런 해방적인 공간으로써 주어졌다. 하지만 이같은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고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면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게이머들이라면 으레 관성적으로 게임을 실행했지만 대체 내가 이 게임을 왜 켰는지 또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상황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같은 순간에 처하게 된 플레이어들은 대충 게임 속 ‘풍경’이나 돌아다니다가 게임을 끄기 마련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주어진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세계의 아름다운 그래픽과 풍경을 둘러보는 일뿐인 것처럼 말이다.


1) 마크 피셔『자본주의 리얼리즘』박진철 역리시올, 2018. 45-52
2) 서동진, <풍경은 넘치지만 현실은 희박하다풍경 이미지의 정치적 퇴행>, OKULO 007,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