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영_의사가 치료하지 않을 때 : ‘검찰관’과 문학의 임무

홍준영

니꼴라이 고골, <검찰관>, 이미지 출처

 의사는 치료하지 않는다. “자연 상태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치료에 더 좋다는 것이죠. 값비싼 약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단순해서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기 마련이고, 나을 사람은 낫기 마련이니까요.” 판사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난 벌써 십오 년 동안이나 재판석에 앉아 있지만, 서류만 들여다보면 골치가 아파서 두 손을 내저을 수밖에 없다고. 그 서류에서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는 솔로몬 왕도 판단할 재간이 없을 거란 말이지.” 시장은 시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놈은 도둑놈이야. 지금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마찬가지야. 결국 도둑질을 할 테니까.” 미지의 검찰관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 이 소도시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희곡 ‘검찰관’의 가장 큰 매력인 웃음은, 도시의 그 누구도 자기 본연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 않았다는 이 설정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감찰 시즌이 됐다고 갑자기 환자들이 회복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의사는 서둘러 소동을 부리며 병원을 꾸민다. “환자의 모자부터 깨끗한 걸로 씌워. 침대마다 일일이 그 위에 라틴어나 아무 다른 외국어로 된 이름표를 붙여놓도록 하고… 거기다가 아무 병명을 기입하고, 누가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지 그 날짜를 기입해…” 일하지 않던 법원에 갑자기 숭고한 무게감이 감돌 수는 없는 노릇이니, 판사는 부산스럽게 나태함의 증거들을 치운다. “암모스 표도로비치 판사! 당신도 재판소 청사에 신경을 좀 써야겠어. 청원자들이 항상 드나드는 대기실 말이야. 거기서 수위가 작은 새끼들이 딸린 거위들을 기르고 있는데, 그 거위들이 발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단 말이야…(중략) 오늘 당장 오리들을 부엌으로 잡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시장님. 괜찮으시다면 식사하러 오시죠.” 고위 관리가 찾아온다고 성난 민심이 갑자기 잦아들 일도 없는 노릇이니, 시장은 늘 하던 대로 뇌물을 줄 궁리에 빠진다. “무슨 조치를? -뻔하잖아. -뇌물? -그렇지, 뇌물이라도 줘야 하지 않겠어?”

 결국 읽는 이(또는 보는 이)의 웃음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원래 소도시의 일상이 얼마나 깊고 더러운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는지가 드러나는 셈이다. 방탕아 흘레스따꼬프를 검찰관으로 착각한 도시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공적 생활을 포장하는 데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난리를 피우면서 극의 희극성을, 동시에 현실의 비극성을 심화시킨다. 그들은 아부에 정신을 팔고,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잠자리에 들어서까지도 줄곧 ‘아, 하느님, 정부가 제 열성을 보고 만족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포상하여 줄지 어떨지는 물론 정부의 생각에 달려 있는 거지만, 아무튼 제 마음은 편안합니다.” 서로를 헐뜯고 고발하며, “(의자를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속삭이듯이 말한다) 그런데 이 지방의 우체국장은 그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업무가 완전히 내동댕이쳐져 있는 데다 우편물은 모두 낮잠을 자고 있는 실정입니다…한번 직접 조사해 보시지요.” 종국엔 딸까지 내바치며 가짜 검찰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발버둥친다. “여보! 이반 알렉산드로비치께서 저희들에게 어떤 영광을 주셨는지 아세요? 우리 딸에게 청혼을 하셨어요! (중략) 옳거니, 역시 안똔이야! 암, 내가 잘했지! 아, 역시 시장답다! 일이 너무 잘됐어!” 고골은 능수능란하게 유머와 위트의 강약을 조절하며 21세기의 독자들에게도 ‘현웃’과 ‘현타’를 선사한다.

 작가가 공들여 창조해 낸 웃음의 제일가는 쓰임은, 물론 현실에서 누적된 분노가 가상의 세계에서 폭발할 때 찾아오는 시원한 쾌감이다. ‘춘향가’를 부르는 명창이 수청을 요구하는 탐관오리 변사또의 만행을 조목조목 읊다가, 휘모리장단을 몰아치며 사또 일행이 풍비박산 나고 사방팔방으로 도주하는 대목에 이를 때 소리꾼 앞에 선 조선 민중들이 깔깔대며 느꼈을 해소감이다. 중세 프랑스의 광대들이 길거리에서 귀족 분장을 한 채 막말과 쌍욕을 날리며 보기 좋게 망가졌을 때 역병과 기근에 시달리던 도시 하층민들이 오래간만에 맛봤을 복수심이다. 고골은 제정 러시아에서 부패한 관료들과 무능한 법관들, 탐욕스러운 의사와 교사들에게 고통받았던 민중들에게 문학이 안겨줄 수 있는 최고의 오락을 제공하기 위해 세심하게 인물들을 설계하고 대사를 세공한다.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이 극진히 모셨던 검찰관이 사실 얼뜨기 대학생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시장은, 민중을 괴롭게 했던 모든 지배계급을 대변해 코미디라는 골고다 언덕에 올라 조롱의 십자가를 지는 셈이다. “시장 : (자기 이마를 친다) 어쩌다 내가, 아니 어쩌다 내가? 내가 늙어빠진 바보지. 멍청한 양 새끼같이. 내가 정신이 나갔어…!(중략) 염병할! 엿 먹어라! 약혼 한번 잘했다! (중략) 나는 바보다, 바보! 늙어빠진 비열한이다! (주먹으로 자기 자신을 쥐어지른다.) 이놈아, 요, 주먹코야! 아니, 그래 그따위 고드름 같은 놈을, 걸레 같은 놈을! 귀하신 분으로 알다니!(중략) 온 세상에 얘기하고 다니겠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삼류 작가라도 나타나면 그 엉터리 글쟁이 놈은 옳다구나 하고 그 이야기를 코미디에 써먹겠지. 바로 이게 화난단 말이야. 관직도 신분도 용서가 없단 말이야. 모두가 이를 훤히 드러내고 웃으며 박수 치겠지…”

 그러나 검찰관의 정체를 깨닫고 스스로의 우스움에 개탄하던 시장이 갑자기 관객석을 돌아보다 날리는 한 마디는, 고골이 정교하게 꾸민 웃음의 둘째 쓰임을 느닷없이 깨닫게 한다. “뭐가 우습나? 결국은 자기를 보고 웃는 거 아닌가….!” 숨이 막혀라 웃으면, 목구멍이 차올라라 웃으면 눈이 시뻘게지고 눈물이 맺히듯, 현실의 암울함을 두고 펼친 한바탕 웃음은 결국 인간 삶에 가득한 비애에 대한 인식으로 돌아온다. 극 중 도시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부패 관리 중 하나가 문득 하늘을 향해 토로하듯 내뱉은, 헛웃음 섞인 대사처럼, “이 세상에 죄 없는 놈이 어디 있어. 이미 처음부터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야…” 치솟는 아파트 값과 땅으로 꺼질 듯한 인건비, 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문과 부모의 사랑마저 수저라는 이름으로 바꿔먹는 빈부격차의 대물림 앞에서 조국을 지옥에 비유할 상황에 내몰린 이들의 너털웃음처럼, 웃음소리 속에 포장된 차가운 현실은 한 박자 늦게 읽는 이의 마음을 저민다. 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실컷 웃고 나면 남의 세상 이야기라면 좋겠지만, 그 이야기가 내일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내가 씨름해야 하는 현실이고 사실 나 역시 그 비극이 유지되는 데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글픔은 고조된다. 그렇게 세상이 우스워지고 사회가 미쳐 돌아갈 동안 보는 너희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작가의 준엄한 질문도 대사 속에서 날카롭게 빛을 발한다. 관객은 배꼽을 잡다 말고 시장과 함께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오, 호, 호! 나는 죄 많은 인간이야. 정말 죄 많은 인간이야. 하느님, 제발, 한시 바삐 이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그들은, 또 우리는 무대 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파도같이 찾아드는 비애감을 피하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 냉소 섞인 조롱과 풍자의 미학이 적절히 구사된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어느 정도는 웃음을 통해 분노를 해소하고 현실을 재인식하며 쾌감과 비애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고골의 ‘검찰관’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대망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결이 다른 웃음의 기능이다. “헌병 : 특명을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신 관리께서 여러분을 지금 당장 모셔 오랍니다. 그분은 지금 여관에 계십니다. (이 말은 천둥소리처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부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위치를 바꾸고 화석처럼 굳어버린다.) (중략) 무언의 장면 : 우체국장이 관객을 향해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중략) 꼬로브낀이 관객을 향해 윙크를 하며 시장에게 신랄한 냉소를 보낸다…(중략) 거의 일 분 삼십 초 가량 모두가 굳어버린 듯이 그 자세를 유지한다…막이 내린다.” 러시아 극장에서 결말부까지 공연이 완료되었을 때 저 ‘일 분 삼십 초’ 동안 쏟아졌을 웃음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가짜 검찰관만을 신명나게 만족시켜주고 이제야 치부를 다 드러낸 채 진짜 검찰관을 맞게 된 도시 지도자들의 패닉 앞에 민중들은 폭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대목에는 단순한 사회풍자가 빚어내는 블랙 유머의 색채를 넘어선, 고대 신전이나 성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법한 견고한 초월성의 낯빛이 어려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집약해 놓은 소도시 전체가 갑작스레 진실이라는 조명을 마주하고 눈이 부셔 허둥대는 장면은 관객에게 웃음 속에 숨겨진 세 번째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선물이란 삶과 사회를 전면적으로 다시 점검하게 하는 반성 의식이다.

 가짜 검찰관과 도시가 함께 벌이는 촌극에 집중했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진짜 검찰관’이 등장하고 인물들이 혼비백산하는 광경을 목격한 관객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예수는 언젠가 다시 돌아와 그동안 벌어진 모든 선과 악의 책임을 묻겠다며 이렇게 말했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6:15) 누군가 나의 삶을 불시에 점검하러 찾아온다면 나는 검찰관의 정체를 알아보고 당당히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가짜 검찰관에게 내 인생의 감찰을 맡긴 것은 아닌가. ‘보십시오, 나리, 제가 나리께서 시키신 대로 연봉을 이만큼 올린 삶을 살았습죠. 어이구, 저는 자나 깨나 나리께서 바라신 대로 남들이 우러러봐 주기 만을 바라면서 살았습죠. 제 학벌을, 직급을, 편력을, 자택의 평수를 좀 보십시오.’ 가짜 검찰관에게 아부를 늘어놓다 어느 날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검찰관으로 알았던 관리가 검찰관이 아닙니다.”라는 통보를 받고 러시아의 한 시장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는 건 아닌가. 그때 울컥 차오르는 비애와 공허함을 피하고자 가짜 검찰관에게 뇌물을 건네며 매달리는 건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검찰관이 증명서에 찍힌 학점만 검사하겠다고 그랬는데, 분명 통장 잔고만 열 자릿수를 넘으면 봐주겠다고 그랬는데. 아들놈 의대만 보내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도장을 찍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나리, 제가 조금만 더 노력할 테니, 조금만 덜 자고 더 일해서 돈을 벌어올 테니까 제가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고개 한 번만 끄덕여주십시오. 나리가 진짜 검찰관이 맞다고 고개 한 번만 끄덕여주십시오…’ 그러다가도 삶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면 깔깔 웃어버리는 건 아닌가.

 고골은, 성경의 말을 빌리면 언젠가 반드시 도둑처럼 찾아올 삶의 감찰관을 대비하기 위해 읽는 이를 일깨우는 게 문학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도시의 민낯을 고발하기 위해 펜을 들었던 흘레스따꼬프의 선언은 따라서 작가의 분노 어린 선전포고로도 들린다. “이 녀석들을 모두 박살 내 버릴 거야. 어이, 오시쁘! 종이하고 잉크 가져와!” 그리고 도시의 지배자들이 그 펜 앞에 추풍낙엽처럼 무너지듯, 고골은 웃음이라는 도구에 기대 첫째로는 러시아 사회를 좀먹던 부패한 기득권을, 둘째로는 그 기득권을 유지시키는 민중의 무력한 서글픔을, 셋째로는 가짜 잣대로 삶을 평가하려 드는 무수한 가짜 검찰관들을 쓸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작업은 역시 강력한 기득권에 의해, 비난을 불쾌히 여기는 민중에 의해, 자신을 따르라고 외치는 수많은 가짜 목표들에 의해 공격받고 수난당하기 일쑤이다. “시장 : 이 엉터리 글쟁이 놈들을, 그냥! 우, 삼류 작가 놈들, 저주받을 자유주의자 놈들 같으니! 악마의 씨를 받은 놈들! 네놈들을 모조리 묶어다가 박살을 내고 말겠다. 그리고 악마의 옷 속에다 처넣고 말겠다! 악마의 모자 속에다 처넣고 말겠다…!” 고골은 실제로 희곡을 발표한 뒤 보수언론과 관료의 비난을 피해 6년 동안 로마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고골은 삶과 사회가 진정한 검찰관의 눈앞에서도 올바르고 거리낄 것 없도록 변화해야 한다고, 그리고 의사의 임무가 환자를 고치고 판사의 임무가 판결을 내리며 시장의 임무가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작가의 임무는 그 변화를 견인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 같다. 그는 아직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찾아오실 그 정의와 진실의 수호자 앞에 떳떳하고자 글을 쓴 것이다. 작품 속에서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인간 군상 속에서도 기묘하고 고귀한 사명감이 아른거리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관’은 관객을 웃기는 희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관객을 울리는 비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차례로 보이고 그 둘을 종합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짚어 보이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문학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입문서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의사는 치료하지 않는다. ‘의대는 졸업했지만, 다리뼈를 잇고 장기를 복원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 테니까요. 차라리 그 시간에 피부미용에 매진하고 눈매를 키워주는 게 피차 이득이지요.’ 판사는 판결하지 않는다. ‘…그 죄질이 심히 나쁘고 반성하는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주취 상태로 판단력이 불분명했던 점, 일정 액수의 공탁금을 제시한 점 등을 고려하여…’ 시장은 시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자식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 직무를 맡았다면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상호 합의 하에 벌어진 일이고 결코 강압은 없었습니다…’ 문학은 소리치지 않는다. 검찰관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반드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