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_양방향 길, 가지 않은 길

1.    「양방향」은 김유림의 첫 개인 시집 표제시다.1) 그것만 읽어도 좋고, 다른 것과 같이 읽어도 좋은. 실은 같이 읽으면 참 좋은 시가 마침 하나 있다. 그 다른 시는 곧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알다시피 이 유명한 시는 시의 화자가 먼 훗날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할 거라고 하는 곳에서 끝이 난다. 숲속에서 »

홍승택_베케트와 계단

베케트의 소설에는 약간의 산수가, 혹은 약간의 수학이 필요한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부분은 단편 「추방자」에 나오는 계단 수 부분이다. “현관 앞 계단은 높지 않았다. 예전에 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계단 수가 얼마나 되는지 수없이 세어보았는데도 지금은 그 계단이 총 몇 개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인도를 »

정강산_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③

정강산(독립연구자)   4. 세계가 되고자하는 재현/기계/객체: 한국 동시대 미술의 경향들  (1)  ‘납작함(flatness)’의 속도와 즉자적 디지타리아트(digitariat)54) 이런 조건이 가진 규정성의 자장 내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혹은 어떤 제약 속에 놓이는가? 어떤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들과 함께, 이하의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몇몇 한국 작가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우선 2010년대 중후반기에 지속적으로 »

홍태림_한 발씩 명료하게 나아가는 미술창작 대가 제도를 기대하며

홍태림(미술비평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현장소통소위 민간위원) “노순택 작가: 예술도 당대의 반영이자 표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생산자의 노동 가치를 취미나 자발성, 선의 따위의 개인적 차원으로 묶어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미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하는 것만도 아니니까요. (…) 명색이 국공립미술관이란 곳마저 작가를 초대하면서 제작지원은 커녕 작가료(Artist fee) 한 푼 »

백두산_겨울, 다큐멘터리 극장

백두산(연극평론가) 겨울 속의 극장: 한국 다큐멘터리/극장과 겨울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부대행사로 기획된 <겨울에는 왕을 죽여야 한다>(DMZ Docs, 2019.9.21.-27)는 2010년대 한국사회의 모순을 다룬 다섯 편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분할, 재구성, 배치하고, 영상의 전후로 퍼포먼스를 병행하여, 오늘 다큐멘터리 극장의 정신과 존재양식을 묻는 도전적인 전시이다. ‘도전적이다’는 말은 대체로 외연이 넓은 것인데, 이 전시기획의 의도에 담겨 있는 »

정강산_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②

정강산(독립연구자) 그러나 보편으로서의 생산양식이 특수로서의 부문적 현상들을 통해 개별로서 나타나는 위와 같은 사례들은 당연하게도 비단 예술의 범주에 국한된 진술이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제 분과 영역들에서까지 관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컨대 18세기의 칸트에게 주체와 객체, 존재와 인식, 지성과 감성의 분리는 이미 하나의 대답으로서 제시되었는데, 여기서 각 영역은 마치 “순수 이성”과 “실천 »

정강산_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 예술의 작업 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①

  정강산(독립연구자)   “전체는 부분과 같지 않다(…)” Aristotle, Posterior Analytics, Translated by H. Tredennick, E. S. Forst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60. p.634.   “(…)특수한 이익은 전체의 보존으로 연결된다.” 헤겔, 『법철학』, 임석진 역, 한길사, 2008, p.524.   “(…)모든 미적 정립에서 문제되는 존재는 언제나 인간 세계이다.” 게오르그 루카치, 『미학 3』, 임홍배 역, »

홍태림_미명(未明)과 여명(黎明)의 사이에서

홍태림(미술비평가, 크리틱-칼 발행인) 어쩌면 개인의 관념과 사회의 불일치라는 말은 사뭇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행복과 불행도 하나의 관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불일치가 언제나 나와 우리의 삶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관념은 어떻게 사회와 일치하거나 불일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

조재연_시계판에 총┃구나: 너와나와너와나

조재연(미학)   1 현재를 살라는 말은 아름다운 잠언이 되었지만 그것은 어쩐지 의심쩍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기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전하며 늘 오늘을 향유하는 자유에 대해 자랑스럽게 논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낱말을 잃어버린 세계 앞에서 죄책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요란한 알리바이가 아닐까. 이때 ‘시간’은 적금 만기일이 도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타임라인 혹은 »

조재연_제가끔 서 있어도 우리들은┃멀티탭: 감각을 연결하기

조재연(미학) ‘세계를 바꾸려면’이란 조건절을 내달은 문장들은 지금 진부해졌다. 이 조건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던졌던 물음에 이윽고 ‘세계란 없습니다’하고 수긍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수긍으로부터 가장 위기에 닥뜨린 것은 존재 자체이기보단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때 예술이란 인상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이름으로 진실한 세계란 이렇다고 호령하며 세계를 규정짓던 것이자, 과거의 세계에는 없을 수밖에 없으나 »

이민주_퍼포먼스, 혹은 전시에 대한 (비)웃음

  퍼포먼스의 형식에 대해 생각한다. 미술에서 퍼포먼스는 1950-60년대를 기점으로, 극장 기반의 전통적 개념인 공연과 달리 미술의 형식적 제한을 넘어서고자 하는 미적 실천으로 등장했다. 퍼포먼스는 작품의 결과와 완성에 대한 엄격한 태도에서 벗어나 작업의 과정에서 감지되는 시간과 행위에 방점을 두면서 시작된 형식이다. 그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신체의 출현과 ‘지금’, ‘여기’의 경험에 값을 »

엄제현_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②

글: 엄제현 이후 성화 점화가 메인인 공식행사를 지나 삼부, <뒷풀이>가 시작된다. 아나운서 이창호는 첫 순서인 <좋은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처음 세상이 열리고,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지내던 좋은 날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하늘에 신비스런 기운 받은 땅의 기쁨을 기리고 하늘의 복을 비는 춤입니다.” 고대 부족들의 제의는 자신이 속한 부족의 종말에 »

조재연_폭력이 어쨌다구

조재연(미학) 1 오랜 동안 윤리는 현자의 돌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것은 바로 폭력이다. 윤리는 이제 어느 사태에서든 어떤 대상에서든 또 어떤 시간에서건 폭력을 증류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악’이라 부를 수 있다고 자신 있고 대담하게 소리친다. 범죄, 테러 행위, 사회 폭동, 전쟁 그리고 그로부터 비명을 지르고 눈물짓고, 피를 흘리는 인간의 »

엄제현_서울올림픽 개막식과 코스모폴리탄①

글: 엄제현 들어가기에 앞서 인용문의 분량이 제법 많아 강조표기를 하여 식별이 용이하게 하였습니다. 미주도 본지에 비견되는 중요함이 있어 참고문헌은 모두 본문에 병기하였습니다. 미주까지 읽어주시면 모쪼록 감사하겠습니다. 들어가며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노출증이 타인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기-보기를 상상하는 유희라면 올림픽도 그와 유사한 보기를 수행하지 않을까? 지구 전체로 뻗어 나가며 세계인을 축제의 참여자로 포획하는 »

이문석_몇 번 쓰고 버려지는 새벽과 대충 쓰여지는 환청

이문석 여섯 해 동안 물류센터 상하차 알바, 일명 ‘까대기’를 하던 이종철씨는 자신의 경험을 그린 만화, 『까대기』를 출간한다. 이 중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이바다’는 작업을 하다가 목장갑이 더러워져 지점장에게 새것을 요청한다. 컴퓨터 사무업무에만 몰두하고 있는 지점장은 새 목장갑 대신 쓰다 남은 목장갑이 담긴 박스를 내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차피 몇 번 »